1960년 4월 나는 학생혁명의 소요로 학교도 못 가고 부모님의 엄명으로 밖에 출입을 삼가하고 집에서 놀고있었다. 초등학교 재학중이던 나는 학교에서 호기심 많은 학생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은 서울 원효로 1가 일명 장군촌으로, 장도영장군(5.16당시 계엄 사령관) 김창룡(특무대장), 김계원 장군(참모총장) 등 당시 내노라 하던 장군들과 정치인이 이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학생 혁명이 일어나던 그날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듣고 서대문에 있는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집에 성난 군중과 대학생들이 몰려가 불을 지르며 화염에 쌓여 있고, 또 다른 대학생들은 트럭에 나누어 타고 자유당 국회부의장 한희석 집으로 몰려 가고 있다는 뉴스였다.
나는 우리집과 한희석 부의장집은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않아 집 뒷문을 빠져나와 선린상고 옆 산을 거의 날다시피 해서 단숨에 그곳에 도착했다.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고 얼마 후 큰 트럭이 나타나며 머리에 티를 두른 대학생들이 흥분된 상태에서 차에서 내려오자 마자 부의장집 대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안으로 굳게 문을 잠그고 이미 가족들은 대피한 상태였다
이때 무리를 주도한 대학생이 나를 보더니 “야 꼬마야 너 우리가 대문 위 지붕으로
넘겨 줄 테니 들어가 문을 열어 보라고 했다” 난 그들이 시키는대로 두려움 없이 가벼운 몸으로 뛰어 넘어 들어 갔다. 앞마당은 아무도 없고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난 지체없이 작은 쪽문을 열어 그들이 들어오게 도왔고 잠시 후 대학생들의 뒤를 따라 다니며 그 당시 상류층들의 삶을 볼 수가 있었다
4월에 큰 냉장고 안에는 이미 수박 참외가 있어 놀라웠고 옷장마다 가득한 옷이며
옷감이 널려 있었다. 동내 아낙들은 제세상을 만난 것처럼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 대학생들이 아무리 소리지르고 막아보려고 해도 그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많은 물건이 마당 한가운데로 모아지고 그들은 쌓여 있는 물건에 불을 지르고 목청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학생혁명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여러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한 학생이 골프채로 TV 스크린을 박살낼 때는 동네 사람들은 너무 아까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댔다.
당시 TV한대 가격은 쌀 20 가마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나는 그곳에 있던 이쁜 화분에 담겨있는 작은 선인장 하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서 갑자기 크게 역정을 내시며 나에게 말씀하시길 첫째 부패해서 망하는 집에서 물건을 들고 나온 것.
둘째는 도적이나 하는 짓을 했다며 나를 크게 나무라셨다. 어린 마음에 깨지고 마당에서 짓밟히는 많은 화분을 보고 화분 하나라도 보호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어서였다.
어린 눈으로 부패한 정권의 말로를 보았고 얼마 후 경무대 (현 청와대)에서 이기붕 국회의장의 큰아들 이강석 육군소위에 의해 권총으로 전가족들을 처참히 사살하고 본인도 자살로 끝을 맺은 비극적 뉴스를 들을 수가 있었다.
부귀영화도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이들 역시 자기에 맞지 않는 분수에 너무 큰 관을 머리에 쓰려 했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쓰러져간 대한민국 제1 공화국 최후에서 과욕이 정치인에게 얼마나 큰 비극인가를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게 되었다.
최근 1년 사이 대한민국에서 2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감옥에 영어의 신세가 되었다. 그 두사람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자기들은 조금도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으며 오직 정치보복을 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딱한 점은 모든 것은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모른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있다
허나 두정권하에 누구 한사람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나서며 그들의 주군을
옹호하려는 자가 지금까지 단한명도 없어 또 한번 한국정치의 비정한 현실을
보고있는 것 같다.
옛말에 이르기를 "복이 있다고 다 차지하지 마라. 복이 다하면 몸이 빈궁해지고, 권세가 있다고 함부로 그세를 부리면 권세가 다 하면 원수를 만나게 된다" 라고 했다 인생에 있어 교만과 허세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느끼게 한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최문규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