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키기 위한 기나긴 여정,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길'
샌프란시스코 한인역사박물관 건립 “우리가 함께해요”
2002년, 정은경 관장은 한국어를 가르치던 평범한 이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의 기록들이었다. 잊혀져 가는 이름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선조들의 발자취 앞에서 그는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잊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결심이 싹튼 곳이 바로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한인역사박물관이다. UC버클리의 교수, 언론인, 금융회사 임원 등 뜻을 함께한 이들과 함께 정 관장은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018년, 서해성 고문의 제안으로 시작된 ‘독립운동 사적지 표석비 세우기’ 사업은 그들이 걸어온 길의 상징이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2021년 12월 오클랜드 한인연합감리교회 앞에 미주 한국인 독립운동 1호 표석이 세워졌을 때, 정 관장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자리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선조들의 숨결이 있었고, 그 숨결은 박물관의 존재 이유를 다시 일깨워 줬다.

<샌프란시스코 한인역사박물관은 '역사 기억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주 한국인 독립운동 표석 사업을 시작했다. 제 1호 표석이 ‘오클랜드 한인연합감리교회'에 들어섰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2021년 12월 5일 성대하게 열렸다. 기념식 끝난 후 표석 앞에서 선 정은경 관장. 코리아데일리타임즈 자료사진>

<지난 2021년 12월 5일 미주 한국인 독립운동 표석 1호인 ‘오클랜드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이를 기념하는 테이프 커팅식과 함께 기념 촬영이 진행됐다. 코리아데일리타임즈 자료사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박물관은 아직도 자신만의 건물을 갖지 못했다. 매달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하고, 후원금이 부족해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한 해를 넘기는 것도 버겁습니다.”
정 관장은 담담히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이 악물고 버텨온 10년의 고통과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앉지 않는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건만,
그는 오늘도 묵묵히 이 길을 걷는다. 왜일까.
“북부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 선조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빚을 갚으려는 마음뿐이에요. 그런데… 쉽지가 않네요.”
박물관은 단지 과거를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를 잇는 다리이며, 정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정 관장은 “역사를 지킨다는 건 곧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며 "1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미주 한인의 역사와 이미 1세대의 희생을 기억하고, 우리 아이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뿌리를 마련하는 것, 그게 제가 해야 할 숙명인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2025년,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이자 샌프란시스코 한인역사박물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정 관장은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이민사 자료를 기록하고 보관하며, 누구나 찾아와 함께 배우고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을 이어가기 위해선 이제 한인사회의 손길이 절실하다. 박물관은 우리 모두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자,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정신의 유산이다.
정 관장은 오늘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박물관 전시실의 불을 켜며 이렇게 다짐한다. “언젠가 이곳에, 우리의 역사를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 다짐 하나로 버텨온 10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여정의 끝에는 또 하나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작지만 진심 어린 후원이 샌프란시스코 한인역사박물관의 새로운 10년을 밝히는 불씨가 될 것이라고 정은경 관장은 믿는다.
<김판겸 기자>




















